박시윤의 절터기행[4] 경주 늠비봉 절터

남산 늠비봉 절 터, 석탑은 누가 세웠나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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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을곡 마애여래불좌상.


윤을곡 마애불좌상

햇살이 일찍 찾아드는 동쪽의 땅, 서라벌의 아침이 환하다.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 두 봉우리가 너른 들판 한가운데 질펀히 누웠다.

영물인 거북이 한 마리가 서라벌 깊숙이 엎드린 형상이다. 오늘은 남산 윤을곡 골짜기를 지나 부흥사를 지나 늠비봉 절터까지 올라볼 참이다.

윤을곡과 부엉골 갈림길에서 윤을곡 산행로를 따라 걷다 왼쪽 산비탈을 오른다. 급한 경사 길에 지쳐 몇 번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드니 지척에 ‘ㄱ’ 자 모양의 바위가 보인다.

 ‘윤을곡(유느리골) 마애불좌상’이다. 누가 부러 가져다 놓은 병풍처럼 바위는 정교하게 꺾여있다. 누구는 ‘삼신(三神) 바위’라고도 하고, 누구는 ‘삼불암(三佛庵)’ 또는 ‘마애삼체불(磨崖三體佛)’이라고도 한다. ‘마애’는 자연 암벽에 무엇을 조각한 것을 일컫는데 주로 불상을 말한다.

정면 남쪽을 향한 바위엔 두 기의 부처를, 오른쪽 서쪽을 향한 바위엔 한 기의 부처를 새겼다. 정면 두 기의 부처는 선이 굵고 선명하게 도드라져 남성스럽다. 반면 서쪽을 향한 한 기의 부처는 선이 얕고 가늘어 도드라짐이 약하다.

석공이 초보였는지 서툰 솜씨다.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로 불린다. 자세히 보면 얼굴과 몸체 좌우엔 부처가 한 기씩, 모두 네 기가 더 새겨져 있다. 남향을 한 부처와 서향을 한 부처는 새김의 기법도 달라 서로 다른 석공의 작품으로 느껴진다.

남쪽을 향한 두 기의 부처 중, 오른쪽 부처의 어깨 쪽에는 ‘태화 9년 을묘(太和九年乙卯)’라는 글자가 있다. 신라 42대 흥덕왕(835년) 때 새긴 부처인 셈이다. 왼쪽의 부처는 약사발을 든 약사여래불로 코도 닳았고 눈도 움푹 파였다.

하필 눈이고 코다. 흥덕왕 시절, 신라는 고통에 시달렸다. 831년 지진과 832년 가뭄, 833년 기근으로 몹시 힘든 시기였다. 절박했던 사람들이 의지할 곳은 오로지 신(神)을 중심에 둔 종교뿐이었을 것이다. 존귀한 부처의 몸을 빌려서라도 살고자 했다.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온 부처 아니던가. 절망적인 사람에게 절박함이 더해질 때, 사람은 이성을 잃고 본능을 앞세우게 된다. 그러니 부처의 파인 눈이나 코는 중생의 불안한 마음을 의지할 유일한 위안이고 안식처였을 것이다.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

등산로로 내려와 오른쪽 산기슭 자드락길을 오른다. 산허리까지 올라 시야를 뻗으니 맞은편 절벽이 지척이다. 부엉골이다. 거대한 암벽, 그 어디쯤에서 대낮에도 부엉이가 운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엉골은 산세가 깊고 험하다.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은 부엉더미 산허리에서 나를 맞았다. 서쪽 절벽을 향한 부처는 세월 탓인지 암질 탓인지, 윤곽이 흐릿해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손을 대면 돌가루가 부서져 내린다. 아, 곧 열반에 들지도 모를 일이다.

부처는 전체적인 선의 깊이가 얕고 가는, 선각에 가깝다. 산기슭 아래로 서너 발 물러서서 부처를 보니, 그제야 부처는 온전히 거기 있었다. 연꽃 대좌에 앉은 부처는 옷 주름의 곡선이 부드럽고, 연꽃의 표현이 세밀해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듯하다.

부처를 등지고 서니 남산 팔경의 하나인 부엉골 황금대가 훤히 내다보인다.
황금대는 석양이 질 무렵이면 골짜기 바위가 모두 황금빛으로 물든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 석양과 함께 부처도 금빛으로 빛난다 해서 ‘황금여래불’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 부흥사에서 바라본 늠비봉 오층석탑.


부엉골 능선 절벽에 자연바위 기단 삼아 우뚝 선 늠비봉 오층석탑

늠비봉으로 가는 길은 산세는 깊어도 길은 완만하다. 길목에 부흥사(富興寺)가 있다. 봄이 한창인 부흥사는 옛 절터에 새로 얹은 절집이다.

대웅전 한편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지붕돌 한 개가 유물처럼 놓였다. 대웅전 마당엔 벚꽃 그늘이 짙다. 꽃잎이 눈처럼 내리는 이른 아침, 능선 위 만개한 벚꽃 사이로 새하얀 탑이 보인다. 늠비봉 오층석탑이다.

‘늠비’는 우뚝 선 봉우리에서 뚝 떨어지는 낭떠러지를 뜻한다. 금오산 삼릉 능선과 오른쪽 해목령 능선 가운데, 부엉골을 향해 뻗어가던 능선이 갑자기 뚝 끊겨 절벽을 이룬다. 그 봉우리가 늠비봉이다.

포석곡 제6사지인 작은 늠비 절터 입구에 들어서면 늠비봉 절벽에 서 있는 오층석탑의 웅장함에 말문이 막힌다.

시원스레 잘 생겼다는 표현 외에 딱히 어울리는 말이 없다. 늠비봉 아래 무너지고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했다고는 하나, 1000년 전 이렇게 웅장하게 탑을 쌓을 기술이 있었느냐는 의문이 든다. 믿기지 않는 것에 대한 의심이라기보다, 웅대함에 대한 놀라움이다. 대부분의 탑재가 없어지거나 약해, 옛 석재와 새 석재를 섞어 복원했기에 지나치게 현대적이다. 하지만 산봉우리 절벽 바위에 저렇게 높은 탑을 우뚝 세운 건, 현대 기술이라 할지라도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산봉우리 자연 바위를 기단으로 삼아 올린 탑은, 산 전체가 탑이고 탑이 산 전체인 셈이다.

탑 아래서 올려다보면 하늘로 치솟은 다섯 개의 지붕돌 모서리가 조금의 틀어짐 없이 일직선으로 나란하다. 누구의 발원으로 세워졌는지 모르나, 석재를 고르고 다듬고 올렸을 적잖은 공들임은 오직 불심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고 서라벌로 이주한 백제인들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쌓은 것은 아닐까.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아득히 먼 고국을 향했을 백제인들. 그들의 짙은 그리움만큼 탑은 한 층 한 층 높이를 더했을 것이다. 그렇게 지붕돌은 다섯 개에 이르렀고, 그들은 염원이 하늘에 닿기를 바랐을 것이다.

탑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느낌도 다르다. 백제인이 기원이라는 가정 하에 탑을 보노라면 무한한 쓸쓸함과 애잔함이 더해진다. 크고 단단한 바위는 자체만으로 신성한 신앙처가 된다. 그들이 쌓은 것은 단순한 예술적 상징의 돌탑이 아니다.

마음을 기댈 버팀목이자 위로이자 안식처였다. 자연 바위를 그대로 기단으로 삼았으니 탑의 뿌리는 가늠하기 어려운 지맥 저 깊은 어디쯤일 것이다. 사람은 비록 세파에 흔들릴지언정 암반을 기단으로 삼은 탑은 흔들리지 못하니, 그들의 웅혼한 염원을 담은 탑만은 절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 [늠비봉 오층석탑] 바위를 기단 삼아 우뚝 선 탑은 산 전체가 탑이고 탑이 산 전체가 됐다.


작은 늠비봉 절터, 큰 늠비봉 절터

탑 뒤엔 작은 늠비봉 절터가 있다. 터를 보니 그리 큰 절은 아니었을 테고, 단칸의 법당 정도만 겨우 갖춘 암자였을 것이다. 앞은 절벽이고, 사방 천지는 탁 트였으니 불어오는 비바람에 부단히 고단했을 것이다.

탑을 뒤로하고 금오봉을 오른다. 빼곡히 들어선 나무숲에 군락을 이룬 진달래가 절정이다. 100여m 남짓 올랐을까.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절터가 아닐까’ 생각할 무렵, 한 치 앞에 절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나타난다.

‘포석곡 제7사지(큰늠비 절터)’를 알리는 표지 뒤로 일대에서 수습한 탑재 일부를 정리해 놓았다. 잡목이 우거진 숲 사이로 평지가 보인다.

필시 작은 암자는 아니었을 테다. 법당과 별도의 요사 한 채가 들어서도 될 만큼의 넓이다.

바람이 일자 대숲이 요란하다. 나는 나른한 상상으로 빠져든다.
숲은 사라지고 법당과 요사채가 가지런히 놓인다. 큰스님은 법당에서 염불을 외고, 수행스님은 마당을 쓴다.

또 다른 스님은 장작을 패고, 동자승은 마당에서 볕을 쬔다.
동자승 발치에 흰둥이 한 마리가 몸을 누였는데, 동자승이 머리를 쓸어주면 졸음에 겨운 듯 눈을 뜨지 못한다. 등 굽은 보살이 찾아와 스님을 향해 합장하고 법당으로 들어선다. 한참 뒤 법당에서 나온 보살은 산기슭 바위마다 손을 모아 합장한다. 어느 따스한 봄날의 절간 풍경이 곱고 나른하다.

한 무리 바람이 일고, 등산객들이 절터를 스치고 멀어진다. 평지는 다시 잡목 우거진 절터로 바뀐다. 큰 늠비 절터에서 뒤를 돌아본다. 우뚝 선 오층석탑과 경주 시가지가 훤하다. 사람들이 바위마다 부처를 새기고 돌을 쌓아 탑을 올린 이유와 서라벌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 법등을 올리며 염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신(神)을 찾아 산으로 왔다. 산과의 교감이 곧 신과의 교감이라는 것을 믿으며, 신은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보듬어 치유하는 존재라고 믿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찾아든 골짜기엔 아직도 신이 살아서 발길 미치는 자마다 복을 누리게 한다는 말을 믿고 싶다.

세월이 흘러 탑은 와르르 무너졌을지언정, 제 뿌리는 늠비봉이라는 것을 탑은 알 것이다. 수백 년 흘러, 탑은 후대의 손을 빌려 다시 일어섰다. 탑이 어떤 모습으로 긴 세월을 살아남았든 제 뿌리의 근원만은 잊지 않았다.

다시 늠비봉으로 내려와 석탑이 보이는 바위에 걸터앉는다. 해가 서녘으로 기운다. 탑을 떠받들던 부재들은 늠비봉 한편에 누워 ‘과거’가 되고, 탑은 ‘현재’가 되어 세상에 순응하고 있다.


박시윤 답사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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