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의 심수정 기문을 풀이하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4월 18일
공유 / URL복사

↑↑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경주의 조선문화가 집약된 양동마을, 양동초등학교를 지나 마을 안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오른쪽 낮은 경사면으로 여강이씨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1494~1553.1.14)의 은거지이자 사당으로 활용된 심수정(心水亭) 공간을 만난다. 정자는 소담한 공간에 이양재(二養齋), 삼관헌(三觀軒), 함허루(涵虛樓) 현판을 걸었고 모두가 농재 선생의 글 자경(自警)에서 가져왔으니, 그의 유교적 세계관이 드러난다.

이양재는 정자(程子)의 『주역』 이괘(頤卦) 풀이에서 “언어를 삼가서 자신의 덕을 기르고 음식을 절제하여 자신의 몸을 기르는 것이다(愼言語以養其德 節飮食以養其體).”를 통해 말과 음식을 삼가고, 삼관헌은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서 “어진 자는 그 사랑을 볼 것이며, 지혜로운 자는 그 도리를 볼 것이며, 강한 자는 그 뜻을 볼 것이다(仁者可以觀其愛焉 知者可以觀其理焉 强者可以觀其志焉)”라며 예로서 모두를 살펴야 한다 하였고, 함허루는 『논어』에서 “학식이 있어도 없는 듯, 충실하되 빈 듯이 하며, 남이 나를 집적이더라도 따지지 않는다(有若無實若虛 犯而不較)”라며 증자(曾子)가 안연(顔淵)의 겸허한 덕성(德性)을 언급하였다.

농재 이언괄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11.23)의 동생으로 3살 터울이면서 스승이자 교우관계였다. 1547년 회재가 양재역벽서사건으로 강계부(江界府:石州)로 유배당하고, 1548년 4월에 계천군(鷄川君) 손소(孫召)의 따님이신 모친상을 당하며 집안은 더욱 안타까움에 처한다.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천리 길을 지나 강계에 이른 농재, 형제의 정을 나눈다. 게다가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우가 유배 간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기구한 인생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서천록(西遷錄)」에 1551년 8월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우 자용(子容:농재)과 작별하며 남긴 시가 애틋함을 전한다.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6)은 회재와 농재 형제 사이를 정호(程顥,1032~1085)와 정이(程頤,1033~1107) 두 형제에 비유하며 우애의 돈독함을 강조하였다. 정호는 이학(理學)의 이상주의학파에 영향을 끼쳤고, 정이는 합리주의학파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되며 이들의 형제 간 우애는 인구에 회자된다. 고봉 기대승은 회재의 신도비명에서 “부모 섬기는 때에 사랑과 공경을 극진하였고, 철에 따라 따뜻하고 시원하게 지내도록 보살피며 입에 맞는 음식을 마련하는 일에도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예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고, 아우 이언괄과 우애와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라며 동생 이언괄과의 우애를 부각시켰다.

양동마을의 여러 인물 가운데 회재와 농재의 우애는 역사적 사건에 얽힌 슬픔이 서려 있고, 심수정과 영귀정의 건립을 통해 후손의 추원보본(追遠報本)하는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심수정기 - 회당 장석영
심수정은 동도의 성산 아래 양좌마을에 있고, 농재 이언괄 선생의 외루(畏壘:은거지)이다. 무릇 마음은 그친 물과 같고 그치면 고요하며, 고요함은 움직임의 근본이고 태극설의 정(靜)을 주로하고, 정좌(靜坐:고요히 앉음)는 배움을 잘하는 것이 되니 이는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 형제 이래로 학문의 종지(宗旨)였다. 선생의 유문(遺文)이 전하지 않아 그 전말을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 『농재일고(聾齋逸稿)』가 있으니 이는 모두가 작지만 귀한 것이다. 공자께서 평소에 말씀하신 “정(靜)이라는 한 글자는 마음속의 물(靜之一字 心中之水)”에서 정자의 이름을 취하였다.

선생은 문원공 회재 이언적의 동생이다. 옛사람의 일을 평론하는 자가 “형제는 사람마다 모두가 있겠지만, 동생 된 자 가운데 동생의 도리를 다한 자는 공일 것이다”라 하였다.

당시 문원공이 석주(石州)의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는데, 천지가 꽉 막히고, 집안이 황폐해졌다. 형제간에 서로 죽기를 다투는 옛사람의 의리에 의하면 시골의 한미한 가문 신분으로 형의 일을 조정에 보고해 임금의 덕을 도왔고 형의 원통함을 폈으며, 밤마다 향을 피우고 지성으로 하늘에 기도하였다.

이때 이기(李芑) 등의 무리가 헐뜯고 음해함이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으나 강계의 위리안치를 거두어 몸을 보전하였고, 또 공이 형을 사랑하는 정성이 하늘에 이르러 마치 형이 말한 바와 같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는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 대현(大賢)의 교화에 훈도되어 크고 작은 일에 성취를 이룬 것이다. 하지만 공을 살피려는 자는 대현의 동생 됨만을 살피고, 몸소 행하고 절실히 실천한 학문을 살피지 않는다면, 이 역시 정백자(程伯子:정호)가 자신의 동생[정이]을 인정하고, 숙자(叔子:정이)가 자신의 형[정호]에게 미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한 것을 모르는 것이다. 조정에서 작위를 내리고, 사림은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미 운천사(雲泉祠), 덕연사(德淵祠)에 배향되었으나 불행히도 훼철되었다. … 지금은 그 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운천사 서쪽 10후도(侯道:활과 과녁의 거리) 거리에 심수정을 건립하고 을축년에 낙성식을 하였다. 형의 영귀정도 마침 같은 시기에 완성되어,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 바라보인다. … 이양재(二養齋), 삼관헌(三觀軒), 함허루(涵虛樓) 모두 유문 가운데 스스로 경계하여 조심하는 말에서 취하였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