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댁 경옥고와 최부자댁 김치 사연지와 처연지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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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최부자댁 안채.


경옥고는 그 시절 귀족 양반들이 만들어 먹던 보양식, 최부자댁 경옥고가 특히 유명

↑↑ 박근영 작가
술 다음으로 특별한 것이 경옥고다. 우리 집 경옥고는 매우 특별한 것으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만큼 소문 나 있었다. 경옥고는 인삼, 생지황, 백복령, 천문동, 구기자, 토종꿀인 백밀 등을 다려서 진액을 낸 것이다.

경옥고는 당시의 부유한 사람들은 우리처럼 손수 만들어 먹기도 하고 이것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대한 최염 선생님의 회고.

“경옥고로 유명한 광동제약 최수부 회장 역시 경옥고 외판원을 하다가 뒤에 광동제약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분이죠. 이분이 살아계실 때 나와 교분이 깊어서 경옥고에 대한 말씀도 자주 나누었는데 ‘이제는 예전과 같은 경옥고를 만들 수 없다’며 늘 아쉬워하셨어요. 지금은 옛날과 같은 좋은 토종꿀을 구할 수 없어서 아무리 공을 들여도 예전처럼 좋은 경옥고가 나올 수 없다는구만...!”

경주최부자댁 경옥고가 좋았던 이유는 경옥고를 달일 때 연료로 반드시 뽕나무 장작만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옥고를 달일 때 화력이 일정해야 경옥고가 고르게 달여지는데 소나무나 다른 장작은 화력이 불규칙해서 경옥고 고는 일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간 이렇게 달인 경옥고는 수십 개의 백자 단지에 넣어진 채 최부자댁 사랑채로 옮겨져 저장되었다.

이 경옥고는 젊음의 유지와 장수를 위한 명약으로 알려져 이게 고아지면 최부자댁 사돈댁을 비롯 중요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보내 마음을 전했다. 최부자댁 가솔들이 대부분 무병장수한 것으로 전해진 것도 이 경옥고 덕분이라고 할 정도다.

경옥고는 원래 최부자댁 사랑채에서 달였는데 최염 선생님이 6~7살 나던 해부터는 인왕서당이란 곳에서 고게 되었다. 인왕서당은 교촌 옆, 경주의 유명한 유적지인 반월성의 동남쪽, 지금의 국립박물관 맞은편 성벽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인왕서당을 문파 선생님이 비싼 값으로 사셨는데 그 가장 큰 이유가 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경옥고를 제대로 달이기 위해서였을 정도다.

반월성은 신라의 왕성이었던 곳으로 민가 건축이 허락되지 않는 국유지였다. 때문에 집이라고는 석탈해왕을 모신 사당인 숭신전(지금은 석탈해왕릉 옆으로 옮겨져 있음)과 이 인왕서당 정도만 있었다. 사방이 높은 토성에 쌓인 오래되고 넓은 성터에 서당이 있었으니 그곳이 사람의 인적이 드물고 개짓는 소리조차 없을 만큼 조용했다. 특히 인가와 멀리 떨어져 파리가 끓지 않는 깨끗한 곳이어서 경옥고를 달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최염 선생님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 문파 선생님으로부터 자주 경옥고를 먹도록 강요받는 것이 무척 싫었다고 회고했다. 어린아이가 먹기에는 한약재의 맛이 강하고 쓴 편이기 때문이었다고. 그래도 그때 경옥고를 조금씩이나마 드셔서 같은 연배의 다른 어른들보다 건강하시지 싶다. 또 하나 이 서당을 산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다음 나올 최부자댁 가보에 대한 이야기에서 들려 드리겠다.



김치의 왕 조기 싸넣은 ‘사연지’와 일상의 김치 갈치 처넣은 ‘처연지’

최부자댁 음식 중 빼놓은 수 없는 것이 다양한 김치의 종류다. 여념집에서는 백김치와 동치미 그리고 빨갛게 고춧가루를 넣어서 만드는 일반적인 김치와 깍두기, 총각김치 등을 담가 먹는다. 여기에 철 따라 열무김치 정도가 추가 될 것이다. 최부자댁은 이들 김치 이외에 ‘사연지’라는 아주 특별한 김치가 있다.

사연지는 얼핏 무슨 대단한 이름처럼 보인다. 한문으로 무언가 뜻이 깊은 이름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할 수 있고 이름처럼 무슨 사연이 깊이 담긴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김치의 이름은 ‘싸서 넣은 지’의 경상도 사투리일 뿐 다른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싸서 넣었다’의 경상도 사투리가 ‘사여었다’이고 소금이나 간장에 절인 것을 ‘지’라고 하는데 ‘싸서 넣은 지’이니 ‘사여은지’ 즉 사연지가 된 것이다.

이름과 달리 방법은 특별하다. 배추를 절인 후 그 가운데 속을 벌여서 각종 양념을 버무려서 고명으로 넣은 다음 이것을 다시 넓은 배추 잎으로 잘 감싸서 숙성시킨다. 그러나 숙성에 들어가기 전에 소금으로 간을 하지 않고 전래의 간장으로 간을 했다. 그리고 이 김치는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대신 잘 말린 고추를 세로로 길고 가늘게 썬 실고추를 넣는 것도 특징이었다. 다 익었을 때 보면 전체적으로 간장의 빛깔과 실고추 녹은 물이 김치나 국물에 그대로 스며들어 노르스름한 빛깔이 나는데 그 맛이 담백하면서도 고소하고 국물이 맛깔나서 한 번씩 먹어본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사연지에서 주목할 것은 양념과 함께 조기를 저며서 넣었다는 것이다. 조기는 지금도 귀한 생선이지만 예전에는 더 귀한 생선이었다. 그만큼 이 사연지는 특별한 김치였던 것이다. 조기는 원래부터 담백하고 비리지 않은 생선이듯 김치 속에서 한 번 더 숙성되면 그 맛이 훨씬 맑고 깊어서 사연지를 최고의 김치로 만드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사연지가 특별한 손님 맞이를 위한 고급 김치였다면 일상적으로 먹는 김치가 따로 있었다. 그 중에서 ‘처연지’라는 김치는 경주 사람 대부분이 먹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처연지 역시 이름이 특별하게 여겨지지만 알고 보면 이 역시 간단하다. 이것저것 마구 처넣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처넣은 지’의 사투리가 ‘처여은 지’가 되어 ‘처연지’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고춧가루 양념과 함께 경주 사람들이 많이 넣는 갈치가 듬뿍 썰어져 들어갔다. 갈치는 조기에 비해 비린 특성이 있어서 김치를 담고 달포는 지나야 비린 맛이 삭아 제맛을 내기 시작한다.

나는 운좋게도 이 두 가지 김치, 사연지와 처연지를 다 맛보며 자랐다. 사연지는 큰어머니 덕분이었다. 경주최부자댁의 인척인 큰어머니는 당시의 일반 주부들이 모르는 온갖 음식을 기막히게 잘 알고 계셨다. 유과니 정과, 약과와 약밥 같은 전통 음식들은 물론 제수용품을 장만하고 만드는 비법들을 많이 알고 계셨다.

사연지도 그중 하나였다. 김장철이 되면 큰어머니만 유독 이상하게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고 실고추와 조기를 넣은 노릇한 국물이 나는 김치를 담으셨는데 그 맛이 아주 특별했다. 나는 그때 그냥 그 김치를 백김치라고 불렀는데 뒤에 최염 선생님 말씀을 듣고 비로소 그 김치가 사연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아쉽게도 사연지는 한 해 딱 한 번 김장이 끝나고 나서 한번 정도 겨우 먹을 수 있었다. 큰어머니께서 한번은 인사로 주셨지만 그 이상은 주시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사연지가 밥상에 올라오면 어떤 반찬보다 먼저 떨어졌을 만큼 맛있었다.

처연지는 경주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익숙하다. 처연지라고 하지 않고 그냥 갈치김치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경주 사람들은 김장 담을 때 김치 속에 갈치를 잘라 넣는다. 이렇게 하면 김치가 한창 익을 때는 숙성된 갈치 맛이 얼마나 좋은지 어지간한 생선회나 생선초밥 먹는 맛보다 훨씬 좋다. 잘 익은 갈치는 강원도 사람들이 해먹는 가자미식혜보다 훨씬 깊은 맛을 내므로 김치에서 골라내 먹는 맛이 특별했다. 이제 어머니가 연로하셔서 갈치 김치, 처연지는 큰누나에게서 겨우 얻어먹을 수 있는 명품이 되었다. 다음 김장 시기에 직접 담가먹어볼 예정이다.

최부자댁은 사연지와 처연지 외에 일반적인 김치도 많이 담았다. 보통의 배추김치와 무김치를 기본으로 철마다 총각김치, 갓김치, 열무김치 등을 담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김장김치도 한 번씩 담그면 보통 수십 접 담았다. 한 접은 100포기를 이르는 말이나 수십 접이라 하면 4~5천포기란 말이다. 그 많은 배추를 집안에서 절이기 힘들어 아예 소달구지로 집 앞을 흐르는 남천(南川)으로 옮겨가 거기서 배추를 다듬고 절인 다음 다시 집으로 가져와 양념에 버무리고 항아리에 담았다. 김장독은 최부자댁 후원 뒤솔밭에 수십 개의 구덩이를 파고 일괄적으로 묻었다. 이렇게 땅에 묻어 두면 초여름까지는 김치를 먹을 수 있었다. 김치 담그는 날이면 최부자댁에서 버리는 시래기나 우거지를 가져가기 위해 동네 아낙들이 모여들곤 했다. 그러면 집안 어른들이 미리 좀 넉넉한 배추를 가져가서 친한 아낙들에게 몇 포기씩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음식과 관련해 최염 선생님의 회고를 다시 들어보자.

“우리 집이 특별하게 잘 차려 먹지는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기본적인 제사와 크고 작은 각종 집안 행사, 손님맞이로 인해서 특별하지 않은 적도 또 없었어요. 기본적으로 제사가 8번에 우리 집안의 특성상 양자를 맞은 집의 제사와 재처로 들어온 어른들의 제사까지 끼어서 제사만 해도 열네댓 번이 되었지. 여기에 설과 추석, 정월 대보름과 단오절, 한식절, 중양절, 섣달 보름 등은 특별하게 취급하는 절기였지 않소. 또 중요한 손님들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을 찾았으니 철 따라 온갖 특별한 음식들을 먹을 기회가 많았던 셈이지”

그러나 이 김치만으로 최부자댁 음식의 특별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태부족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기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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