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박목월과 얼룩송아지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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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룩송아지 노래비 옆에 선 목월.(사진 출처: 동리목월문학관)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 귀가 얼룩귀 엄마 닮았네


어린이 노래의 대명사

경주시민이 사랑하는 황성공원에 가면 얼룩송아지 노래비가 있다. 매년 봄이면 이곳 노래비 앞에서 목월 백일장이 열린다. 목월의 명성에 걸맞게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행사이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얼룩송아지」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엄마가 나를 재우기 위해 불러주었던 노래였으며, 내가 아이를 달래주거나 잠재울 때 불러주었던 친숙한 노래이다. 어머니 품에서 뼛속까지 스며든 노래여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목월은 1933년 계성중 재학 중이던 18세 무렵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짝짝」이 윤석중에 의해 뽑혔다. 같은 해 《신가정》에 「제비맞이」가 당선이 되면서 시보다 먼저 동시 작가로 출발했다. 1940년 《문장》지를 통해 시인으로 데뷔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박목월은 윤석중, 강소천과 더불어 한국 현대 동시 개척의 선구자 역할을 했으며 1961년 동시집 『산새알 물새알』을 발간하였다. 동시집에 수록된 시는 「물새알 산새알」이다. 간혹 시와 시집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다, 동시집은 현재까지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으며 제목을 달리하며 재출간 되고 있다.

「얼룩송아지」가 우리에게 잘 알려지게 된 계기는 동요로 만들어졌고 1948년 국민학교 1학년 교과서에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노랫말과 4분의 4박자의 가락으로 동심을 읽을 수 있는 노래는 어린이 노래의 대명사가 되었고 국민동요가 되었다.


↑↑ 지난 4월 14일 황성공원 목월시비 앞에서 열린 제57회 목월백일장 개회식 모습.(사진 출처: 경주문인협회)


황성공원 노래비 제막식 날의 풍경

어린이날 기념으로 세워진 이 노래비와 관련된 목월의 글이 있다. 수필집 『그대와 차 한잔을 나누며(자유문학사)』 의 「어머니의 귀」 편에 그날 하루의 표정을 자세히 담고 있다.

노래비는 새싹회 대표 윤석중의 발의로 건립되었는데, 세워진 계기는 노래를 만든 작사자의 공적보다는 어린이에게 동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전국에 여섯 편의 동요 노래비를 세우는 그 가운데 「얼룩송아지」가 선정되었다.

1968년 5월 30일 노래비 제막식이 있던 날 서울에서 아동문학가 김요섭, 윤석중 그리고 목월 선생 내외분이 정오 무렵 경주에 도착했다. 황성공원 행사에 참석한 사람 중 고향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니 내 알겠나” 옥양목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시골 노인이 물으며 다가왔지만 어정쩡한 목월에게 “내가 이 아무개다”라고 말한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의 동창생이었다.

“지 누군지 알아보겠는교?”하며 물어오는 청년은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분 아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저 멀리서 “보재이 이사람” 하고 손짓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어 가보니 문중의 어른으로 일가친척이 되는 분이었다. 이처럼 이날 행사에는 고향 사람들이 대거 참석하였는데 건천초등학교 모교의 학생들, 교장 선생님,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들, 지방 유지, 면의 리동(里洞) 대표들, 친지 친척 등 수백 명이 자리했다. 또한, 면에 있는 무산 고교의 밴드부, 대구 모교의 부속 초등학교 어린이 합주단이 「얼룩송아지」를 연주하였는데, 표현을 빌리자면 연주로 시작하고 연주로 끝났다. 행사가 끝난 뒤에는 돼지를 잡고, 막걸리를 걸러 푸짐한 잔치가 벌어졌다. 이날 행사비용은 고향 사람들과 친구들이 추렴하였다고 한다.


↑↑ 황성공원 내 자리한 목월 노래비. (사진 출처: 경주문인협회)


나를 남이라 여겨지 않는 고향 사람들

이날 목월은 다른 행사 일정으로 먼저 떠났지만, 제막식 행사에 참석한 건천 사람들은 돌아오는 길 내내 밴드와 어울려 어른, 학생 할 것 없이 「얼룩송아지」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귀향했다. “햐 말도 마라 얼룩송아지 때문에 단석산이 떠나갈 듯 같았다” 이 말은 고향 친구가 나중에 목월에게 들려준 후일담이다.

시인이 자란 땅에 노래비가 선다는 것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상징물로 의의를 지니지만, 그것을 통해 베풀어주신 너무나 깊은 애정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시인은 얼룩송아지 노래비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에게 그들은 남에 불과했지만, 힘도, 재력도, 권력도 없는 한갓 문인으로 보답할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남으로 여기지 않았다. 동창생으로 혹은 선배로, 같은 면민으로, 한동네 사람으로 다정한 인간적 유대감을 이야기하면서 완전한 남이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라고 했다. 특히 경주라는 곳이 그렇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강한 뿌리 의식은 저절로 애향심을 갖게 하는지 모른다. 동리와 목월이 문학적으로 향토성 짙은 작품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얼룩송아지는 어머니의 노래이기도

목월은 얼룩송아지에 대한 언급을 아끼지 않았다. 어미 소를 닮은 얼룩송아지란 무엇일까?

그것은 엄마 소의 연장(延長)으로서 그 바탕은 엄마 소이다. 그러므로 ‘어버이와 자식과의 관계는 어버이와 자식이라는 두 개의 존재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어버이를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사람이 되어간다. 아무리 사람이 되어도 바탕은 부인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얼룩송아지 제2절 ‘엄마 소도 얼룩 귀/귀가 닮았네’라는 구절이 있다. 왜 하필이면 귀를 닮았네 했을까? 목월은 이에 대해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그 사실로서 어머니의 귀를 닮았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수필의 제목도 얼룩송아지를 이야기하면서도 「어머니의 귀」로 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간단한 「얼룩송아지」 노래를 통해 시인은 어머니를 노래하고 있다. 얼룩송아지 노래는 어린이 노래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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