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연인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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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철 교수
동국대 파라미타 칼리지
연애를 했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썼다고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연애하면 상이라도 줘야 할 판에 웬 반성문일까 싶겠지만 사실이다. 연예인이 연애를 했다고 대중을 상대로 반성문을 쓴 믿기지 않는 해프닝이 한국에서 벌어졌다. 당사자는 지금 가장 핫한 유명 걸그룹의 리더이고, 어떤 배우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팬심이 얼어붙었다. 이때 팬이란 반성문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가며 마음을 돌려야만 했던 찐 팬들을 말한다.

보통 연예인은 노래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인기를 끌면서 팬덤을 구축하게 된다. 해당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소위 킬러 콘텐츠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인기를 끈다고 무작정 환영할 수만은 없다. 대중이 환호할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느냐, 아님 고갈되고 도태되어 킬(killed)이 되느냐가 이들 킬러 콘텐츠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 살벌하지만 나름 합당한 이유는 쇼 비즈니스 생태계에서 찾을 수 있다. 팬덤 비즈니스는 수익 구조 측면에서 연예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가령 대중음악 산업은 노래만으로 소구 되지 않는다. 노래는 물론이고 드라마나 영화에 어울릴 만한 마스크,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끼를 발휘할 정도의 말재주, 거기다 요리 솜씨까지 갖춰야 한다, 팬들의 다양한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종합엔터테인먼트 성격의 아이돌이 탄생한다. 이른바 스타시스템이다. 일반 제조업이나 IT사업과 달리 연예인을 중심에 둔 엔터 회사는 한마디로 인력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누굴 사귄다더라 식의 루머라도 퍼진다면 해당 주식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따라서 결론은 이렇다. ‘연예인은 연애를 해서는 안 된다!’ 아이돌은 만인의 연인이어야 한다.

이때 반성문을 써야 할 정도로 질투심 많은 만인(찐 팬들)은 사춘기 청소년들이다. 신체적인 이유가 있다. 아동기와 성인기 경계선에 있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외모에 낮은 존재감을 느낀다. 우리 아들도 여드름꽃이 만개할수록 아주 그냥 걸 그룹에 푹 빠졌었다. 심리학적으로 자신과 아이돌 스타를 동일시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경향 때문이다. 부모나 기성세대의 가치관은 무조건 거부하고 또래 문화와 생활 방식은 강하게 모방한다. 그래서 아이돌 스타 팬클럽에 가입하는 걸로 청소년들의 자아존중감이 높아진다는 연구가, 콘서트 참가가 청소년들의 자아존중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낯설지 않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아이돌의 어원(idolum)만 봐도 그렇다. 아이돌은 우상이라는 뜻으로 신을 숭배하기 위해 만든, 신을 표상하는 이미지나 물질적 대상 같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돌은 맹목적인 경배나 찬양, 헌신의 대상이다, 팬들에게 아이돌은 종교인 셈이다. 아이돌 스타에 대한 우상화는 자연스레 이들의 행동, 태도, 가치관 등 전반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이들에게 아이돌은 동경의 대상이자 동일시의 대상이다. 절이나 교회당에서 절하고 예배드리는 것처럼, 이들은 아이돌의 음반을 구입하고 음원을 다운로드하며 방송이나 콘서트를 관람한다. 그들만의 수행 방식이다. 팬덤이 없는 아이돌 스타는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팬덤이 자연스레 광대한 세력권을 형성해 나가는 구조에 있다. 특히 우리나라 아이돌 팬덤은 역동적이다. 가령 내가 사랑하는 연예인이 힘든 상황에 처했다 치자. 연예인들의 위기 상황이라면 대충 손에 꼽을 만큼 범주화할 수 있다. 연예기획사의 부당한 전속계약이나 처우 문제, 아니면 계약기간 종료로 인한 그룹해체 논란, 또는 악의성 미디어 왜곡 보도 등이다. 나만의 연예인이 위기 상황에 빠졌다면 팬들은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발적으로 수천만 원을 모금해서 신문에 광고를 낸다거나 가두집회를 열고 서명운동을 주도한다. 뿐만 아니다. 소속기획사를 상대로 불매운동을 벌이거나 다양한 입법청원을 하기도 한다.

이런 움직임 역시 심리학적 근거가 있다. 팬심에 기초한 아이돌 비즈니스가 ‘유사 연애 감정’ 나아가 ‘유사 사회관계’라는 토대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맺어진 사회관계가 아닌데도 사춘기 아들딸들의 심리 속에서는 아이돌과 실제 사회관계로 경험되고 있다. 누가 봐도 일방적인 짝사랑이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다. 아이돌 오빠는 내 존재를 전혀 모른다지만 다들 모르는 소리다. 오늘 콘서트장에서도 오빠가 나에게 손을 흔들어줬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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