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적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7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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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적


                                                     조경선


들어오는 길 있으면
나오는 길 있습니다

작지만 그 안에 큰 뜻을 채워 넣고
내 곁을 지키고 앉아 열리고 닫힙니다

숨구멍 손 뗄 때마다
쏟아내는 울음들

한 번 품은 생각은 물결 따라 퍼져나가
갇혔던 감정을 풀어 몸 낮춰 번집니다

​천년을 걸어온 말
물방울로 읽어내도

​그 속을 알 수 없어 몇 번을 기울이면서
제 속을 비워냅니다 하루 받쳐 공손하게



‘연적’, 침묵의 몸짓으로 일깨우는 ‘시인’의 표상

↑↑ 손진은 시인
조경선의 「연적」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균형잡힌 시이다. 시인은 주체 탐색의 과정에서 자신을 가장 자신답게 드러내기 위해 ‘연적’이라는 기물을 설정한다. 알다시피 ‘연적(硯滴)’은 ‘벼루에 먹을 갈 때 쓰는 물을 담아 두는 운치 있는 용기(用器)’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연적’인가? ‘연적’은 “들어오는 길”과 “나오는 길”을 가지고, 시적 화자 곁에서 “큰 뜻을 채워 넣고” 열리고 닫히는 사물이라는 점이 여간 심상치 않다. “내 곁을 지키고 앉아”라는 말은 시적 화자가 ‘연적’을 깨어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다. ‘연적’은 시적 화자 ‘나’를 일깨우는 존재로 기능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또 통상 우리가 물구멍이라 부르는 “숨구멍(에서) 손 뗄 때마다” 울음을 쏟아내는 ‘연적’의 감정을 보지만, “한 번 품은 생각”으로 표상되는 그 물방울은 그 “갇혔던 감정을 풀어 몸 낮춰 번”지는 길을 간다. 그건 생각과 사유는 몸을 최대한 낮춘 채로 행간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이다. 너무 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묽지도 않게 적당한 농담(濃淡)을 가질 정도로 갈아진 물방울로 말이다. ‘연적’이 붓으로 글쓰기를 구현하는 도구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더라도, 시의 문장은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게 아니라 낮고 자연스레 번지는 방식을 통해 미적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시적 화자 스스로가 “천년을 걸어온 말”을 “물방울로 읽”고 있다고 말한다. 하기야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연적’의 물방울에서 그 말을 길어 왔던가.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연적’은 스스로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사물. 그래서 연적은 “몇 번을 기울이면서” 날마다 “하루(를) 받쳐 공손하게” “제 속을 비워” 자신을 갱신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연적’이 담고 있는 물방울이 생각(사유)과 뜻과 말을 낮게 흘러 번지게 하며, 공손함으로 날마다 자신을 기울여 내면을 열어 보이는 기물이요 영혼이라는 것을 말했다. 결국 이 작품에서 ‘연적’은 내면 속에 침묵의 심연을 만들어내는 존재. 그렇다! 시적 화자가 그렇게도 닮고 싶어하는 시인의 표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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