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단구리 옥구이씨 삼강묘비를 찾아서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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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경주 강동면 다산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옥구(沃溝)이씨 성인당(成仁堂) 이희룡(李希龍,1549~1592)과 그의 아들 이문진(李文軫) 그리고 며느리 김씨에 대한 충(忠)․효(孝)․열(烈)의 삼강(三綱)을 기리기 위해 1709년에 건립된 삼강묘비가 있고, 그 옆에 절효(節孝)·충렬(忠烈)·삼강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정려문이 우뚝하게 자리한다. 그 주변으로 후손이 마련한 삼송재(三松齋)가 있고, 그 뒤편에 사당이 있었다.

이희룡은 선조 9년(1576) 28세에 식년시 병과에 합격해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호위하였고, 경주와 울산 사이 적의 동향을 엿보고자 내려가다 충주의 달천(獺川)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에 그의 아들 이문진은 충주에 이르러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고, 불행히도 영천 신녕에서 왜놈에게 잡혀 살해된다. 이 소식을 접한 이문진의 아내 역시 남편과 시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시체 더미를 뒤지고, 심지어 손수 바느질한 옷감을 비교하며 3개월을 찾아다녔으나, 찾을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1712~1779)은 「삼강비명(三綱碑銘)」에서 “이희룡의 자는 사휘(士輝)이고, 선대는 옥구사람이다. 훗날 경주에서 집안을 이루었다. 병법을 좋아하고,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합격해 사헌부 감찰에 보임되었다. 선조 임진년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의주에 왕을 따라갔다가 영남에 적을 정탐하는 명을 받았다. 이때 적이 충청도와 경상도에 넓게 주둔해 있었고, 천리에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공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경주와 울산 등지에 출몰하였고, 허실과 완급의 상태를 살펴 다 얻었다. 왕이 계시는 행재소(行在所)로 돌아가다가 충주에 이르러 적을 만나 나아가지 못하게 되자, 공은 ‘왕명을 받은 몸이라 몸을 욕되게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앞에 나아가 적과 싸워 죽음으로 임금에게 알리겠노라’하고는 마침내 홀로 힘써 싸우다 죽었다”고 언급한다.

1709년에 어사 박봉령(朴鳳齡,1671~1718)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고, 이듬해 이희룡은 통정대부 참의, 이문진은 도사(都事), 며느리 김씨에게 종9품의 단인(端人)에 추증되었고, ‘節孝忠烈三綱俱備之門’의 정려문이 내려졌다.

삼강은 유고 윤리의 세 가지 근본으로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의 벼리를 말한다. 벼리는 그물의 위쪽에 코를 꿰어 잡아당길 수 있게 한 줄로 벼리를 촘촘히 당기면 안의 고기가 나가지 못하고, 반대로 벼리가 느슨해지면 안의 고기가 모두 달아나 낭패를 당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마음속에 군신, 부자, 부부 이 세 가지의 벼리를 잘 단속해 사람의 도리를 펼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에 대제학을 지낸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1698~1773)은 「이씨삼강묘비명(李氏三綱廟碑銘)」에서 “한 집안에서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고,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죽고, 며느리가 남편을 위해 죽어서 삼강의 온전함을 얻은 경우는 세상에 견줄 만한 것이 없이 가장 뛰어날 것이다(若一家之內 臣死於君 子死於父 婦死於夫 得三綱之全者 亦天下一而已矣)”라고 높이 평가하였으니, 조정과 옥구이씨 집안의 큰 자랑이 된다.

영조 17년(1741)에 올린 장계의 의하면, “단구사사(丹丘社祠)는 증 참의 이희룡, 학생 권복흥(權復興), 도사 이문진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경술년(1730) 2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박문수(朴文秀)이고, 부윤은 이중관(李重觀)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석표(李碩標)입니다”라고 전한다.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역시 단구향사에 임란의병장 이희룡, 권복흥, 이문진을 제향하는 봉안문을 지었다.

이희룡에 대해서 『영남인물고』,『여지도서』 및 다수의 문인들 글에 전한다. 그런데 남유용의 「이씨삼강묘비명」 글에 의하면, 이희룡의 자를 응서(應瑞)로 기록하였고, 앞서 최천익이 지은 「삼강비명」에는 자를 사휘(士輝) 등으로 표기하였으니, ‘이희룡’ 동일인물에 대해 정확한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내남 고곡리 전투에서 사망한 이희룡[자 운로(雲老)] 의병장도 있다.

게다가 1972년 강동면 오정길에 건립된 우애당(友愛堂)은 형 이변룡(李變龍)과 동생 이희룡(李希龍)이 부친 이응백(李應百)의 상을 당하자, 형제가 여막을 짓고 3년 시묘(侍墓)한 일로 ‘우애당’이라 편액하였다. 그로 인해 예로부터 효막동(孝幕洞)으로 불렸고, 우애당 안에는 유연재(惟湅齋), 성인재(成仁齋)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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