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노래가 된 목월의 시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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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천읍 모량리 소재 목월생가를 방문한 문인들.

그 옛날엔 노래와 시가 하나였다. 노래를 위한 시였지만, 모든 시들이 노래가 되지는 않는다. 가곡으로 불려진 목월의 시는 40여편이 된다.

시 22편이 38곡의 가곡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시 「나그네」의 경우 14명의 작곡가에 의해 곡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 문학사와 음악사의 이례적 기록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만들어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소월, 조병화 시인과 더불어 가장 많이 가곡으로 불려진 시인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노래만 해도 대략 20여곡 이상이다.

열거해 보면 「나그네」,「산도화」, 「그리움」 ,「모란 여정」, 「첫사랑의 꿈」, 「이별의 노래」, 「망향가」, 「사월의 노래」, 「청밀밭」, 「별이 떨어지는 밤」, 「그리운 밤에」, 「어둠의 광야에서」, 「그대를 만날 때」, 「겨울 뜰」, 「구강산」, 「사랑과 미움」, 「달밤의 바다」, 「한 송이 들장미」, 「영원한 꿈」, 「발길을 돌리며」 등이다. 이렇게 많이 노래가 된 것은 목월시의 서정성과 리듬감 때문일 것이다.

e북으로 출판된 『예술가곡으로 승화한 박목월의 시세계』라는 4인 공저의 책에는 시 132편이 가곡화 되었다고 한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다.

이처럼 많은 가곡 가운데 「사월의 노래」와 「이별의 노래」는 봄과 가을 계절을 대표하는 가곡이다.

봄 노래 「사월의 노래」 (김순애 작곡)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이다. 고교시절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반월성 벚꽃에 마음이 울렁거려 벚꽃 흐드러진 그곳으로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던 추억이 있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그 옛날 젊은날처럼 가슴이 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1절)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2절)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후렴)

1953년 잡지《학생계》 창간을 기념해 목월이 작시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작곡가인 김순애가 작곡하여 메조소프라노 백남옥이 처음으로 불렀다. 박목월 시인이 전쟁 전 이화여고 교사로 근무할 당시 교정에 목련꽃이 만발하면 여학생들이 그 아래에 모여 책도 읽고 편지도 쓰던 풍경을 떠올리며 썼다고 어느 수필집에서 밝힌 적 있다.

↑↑ 박목월 육필시노트(제주편).


가을 노래 「이별의 노래」 (김성태 작곡)

가곡 「이별의 노래」는 쓸쓸함을 더해주는 가을 노래의 대명사격이다. 1953년 피난지인 대구에서 만들어진 노래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많다. 시인들 술자리에 노래에 얽힌 목월의 연애담은 세월이 흘렀어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시인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말을 아꼈지만 이젠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목월은 자신의 책 『구름에 달 가듯이』 (1973년 삼중당)에서 ‘세상에서 널리 불려진 이별의 노래에서 내가 노래한 상대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자기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이름 하나를 감출 줄 모르는 헤프고 어리석은 바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86년에 나온 『자하산 청노루』에서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대생과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시가 「이별의 노래」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노래가 쓰이게 된 동기에 대해 제자인 이근배 시인의 ‘문학동네에 살고지고(2001.1.22일자 중앙일보)’라는 글을 참고할 만하다. 분량이 많아서 부분, 부분만 발췌해서 인용해보면 아래와 같다.

목월의 이별의 노래는 목월이 실제로 만남과 이별의 아픔을 겪으면서 있었던 감정으로 진솔하게 시를 쓴 것으로 생각한다. 이별 뒤에 비워진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을 목월은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라고 한 것이다(중략)

목월은 이 노래로 그녀와의 긴 이별을 아름답게 승화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목월의 아름다운 이별이 있었기에 지금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지금도 사랑하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중략)

서울로 올라온 목월은 바로 아내와 아들,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효자동에서 두 달 동안 하숙생활을 하다가 귀가한다. “사랑하느냐고/ 지금도 눈물어린 눈이/ 바람에 휩쓸린다”고 목월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시 속에 심다가 붓을 놓고 갔다. 그 하늘 구만리 기러기 울어예는 뜻을 내사 알겠네. (이하생략)

「이별의 노래」는 또 다른 명곡 「떠나가는 배」를 탄생시켰다. 제주에서 목월과 소통했던 양중해 시인이 작시하고 변훈이 작곡했다. 두 사람은 제주 제일중학교 국어 교사와 음악 교사였다. 목월과 H양의 이별 장면을 보고 지었다고 양중해의 시인이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가곡 「떠나가는 배」는 제주도의 문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노래의 작곡 시기와 시의 작성 시기가 다소 이견이 있지만, 아무튼 박목월과 관련되기 때문에 더 유명해진 것은 사실이다. 최근 미공개 유고시에서도 제주에서 쓴 시편들이 다량이 발표되기도 했다. 무슨 비밀이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서둘러 구입해서 펼쳐보기도 했다.

목월은 시 보다 먼저 동시를 발표했던 만큼 어린이를 위한 동시 작업에도 선두에 섰다. 이 땅의 동요 보급에도 진심이었던 만큼 동요로 불리고 있는 동시가 많다. 생전에 그는 『산새알 물새알』(1959년)을 비롯하여 두 권의 동시집을 낸 바 있다. 국민 동요 「얼룩송아지」외에 『가을이래요』, 『다람다람 다람쥐이야기』, 『할미꽃』, 『노래는 즐겁다』, 『자장가』 등 수십 편에 이른다.

박목월 동시 연구에 관한 논문만 하더라도 수십 편이 넘는다. 우리나라 동시와 동요 보급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황성공원에 최초로 얼룩송아지 노래비가 세워진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박목월의 작사한 교가(校歌), 사가(社歌), 군가(軍歌)

목월이 작사한 교가가 여러 학교에서 보인다. 서울 신일고, 영천 영동고, 문경 문창고, 울산 신정고, 울산여상, 학성여중, 충남 태안중 등이다. 먼 곳도 있고 가까운 지역도 있다.

울산지역에 많은 것은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법인 울산 육영회 산하 학교들과 연결된다. 기타의 학교들도 비슷한 배경들을 가진듯 하다. 1970년 울산의 공업과 산업도시 지정과 맞물려 「울산의 노래」를 작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부르지 않고 있다. 목월은 고향의 모교인 건천초 교가를 작사했다. 작곡가는 얼룩송아지를 작곡한 손대업이다.

같은 고향인 건천의 무산중·고 교가도 목월이 작사했다. 두 학교의 교가에는 모두 단석산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교가와 마찬가지로 기업의 사가 또한 1970년대에 작사한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일보(1969년 나운영 작곡), 포스코(1973년 김동진 작곡), mbc방송국(1974년 손석우 작곡), 대림산업 (1977년 김동진 작곡) 등이 대표적이다.

군대시절 열심히 불렀던 군가 『전우』(1973년, 나운영 작곡)도 목월이 작사한 노랫말이다. 찾아보면 가곡, 동요, 사가, 교가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의외로 대중가요가 눈에 띄지 않는 것도 특이할만하다. 사회 전반에 목월의 노랫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달리 말하면 시가 닿지 않는 곳도 없다는 뜻이다. 계절은 노래에서부터 먼저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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