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15] 경주 용장사 터
주인 없는 허공에 발 딛고 서니 온 천하가 내 것이외다
길 따라 역사를 마주한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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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은 용장골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벼랑에 서있다. 해발 400m의 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쌓아 올린 석탑은, 늠비봉 오층석탑과 함께 산 전체가 탑이고, 탑이 산이 된 셈이다. |
남산 용장골을 오르며
경주 남산엔 수많은 골짜기가 있다. 어느 곳으로 오르든 신라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중 가장 큰 골짜기는 용장골로 길이가 3㎞에 달한다. 신라시대 용장사(茸長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용장골’로 불리며, 아직도 탑이 남아있어 ‘탑상골’로 불리운다.
남산은 해발 500m도 안 되는 산이지만 발길 닿고 눈길 머무는 곳마다 석불이요, 석탑이요, 절터다. 이 골짜기만 해도 용장사 터 외에 20여 개의 절터가 있다고 알려졌다. 불교가 왕성했던 시절엔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끊일 날 없었을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서라벌을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이라고 묘사했다. ‘절과 절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졌고, 탑들은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섰다’ 했을 만큼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이었다.
용장사 가는 길
설잠교(2000년대에 설치한 용장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김시습의 법명 ‘설잠’을 따서 붙인 이름)를 지난다. 길이 무척 가파르다. 지금까지 물소리, 바람 소리 벗하며 한가롭게 자연을 음미하며 걸어왔다면 여기서부터는 힘겨운 고행이 시작된다.
빼곡히 숲을 이룬 대나무 군락 사이로 몸을 숙여야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길이 나 있다.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미묘한 느낌이 든다. 대숲이 보이면 유난히 반갑다. 절터나 집터같이 인간이 기대 산 흔적이 가까이 있다는 표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숲을 빠져나와 가파른 길을 오르니 그리 넓지 않은 평지가 펼쳐지고 이내 시야가 탁 트인다. 가쁜 숨을 고르며 풍광을 눈에 담는다. 가슴마저 ‘뻥’ 뚫린다. 용장사 터는 금오봉이 남쪽으로 뻗어 내린 봉우리에 있다. 한 칸 법당만 겨우 존재했을 만큼 좁은 터지만, 풍광만큼은 고고하고 장엄하다. 욕심을 버리고 이상적인 삶을 좇는 사람이라면 지나치지 못할 풍광이다.
용장사와 매월당 김시습
‘갑술삼월일용장사(甲戌三月日 茸長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용장사는 신라 유가종의 종조 대현스님이 기거했고, 그 후 어느 시절에 무슨 연유로 폐사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폐사된 후엔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숨어 살면서 《금오신화》를 집필하기도 했다.
조선 초, 단종이 폐위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김시습은 대성통곡하며 읽던 책을 모두 불살랐다. 단종의 복위를 꿈꾸던 신하들마저 참형을 당하자 벼슬의 꿈을 끊고 승려가 되었다.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수년간 전국의 명산대찰을 유유자적하며 떠돌다가 용장골에 들어와 은둔했다.
김시습이 용장골에 있는 것을 안 세조가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했으나, 김시습은 건너편 골짜기로 몸을 피했다. 세상에 인걸은 많으나 내 사람으로 곁에 두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위 벼랑 아래, 단출한 암자 하나 짓고 밤낮으로 법등 밝히고 살았을 김시습을 생각한다. 바람이 문 두드리면 ‘뉘시오? 그저 시나 한 수 읊고 가시오’ 할 것만 같은 키 작은 탁발승.
김시습은 골짜기마다 미친 척 희희낙락하다 결국엔 산기슭 꽃 한 송이, 바람 한 점에도 슬퍼하며 북향화를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꺼억꺼억’ 울었을 탁발승은 세월 따라가고, 그가 홀로 서성였을 벼랑엔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 서서 그를 대신한다. 그가 가고 흐른 세월을 생각하니 저 멀리 풍요로운 들판도 그새 많이 변했겠다 싶다.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용장사 터를 뒤로하고 조금만 더 오르니 높은 대좌에 머리 없는 부처가 앉았다. 보물 제187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이다.
자연 바위에 동그란 좌대를 3단으로 쌓아 꼭대기에 앉아 서쪽을 향하고 있다. 부처의 자태가 정갈하다. 가볍게 흘러내린 가사의 주름이 섬세하고, 조여 맨 옷고름의 맵시가 뚜렷하여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훌훌 풀어질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 시절, 용장사 주지 대현이 매일 탑 주변을 돌며 염불을 하자, 석상의 얼굴도 함께 돌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니 이 머리 없는 석불을 두고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미륵불로 보기도 한다.
간혹 석불의 머리가 없는 것을 두고 일제강점기 때, 민족말살정책에 의한 훼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자연적인 상실과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숭유억불정책에 의한 훼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용장사 터 석조여래상은 뒷목 쪽에 내리친 흔적이 있다하니 자연 상실보다는, 어떠한 이유가 됐든 훼손에 가깝다는 견해가 크다.
얼굴이 없으면 어떤가. 얼굴이 있어야만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따뜻하고 환하게 웃고 있어도, 속은 어둡고 냉골인 사람이 있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부처의 표정도 있는 것이다. 내가 웃으면 부처도 웃고, 내가 슬프면 부처도 슬프다.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석불 뒤로 병풍을 세운 듯 암벽이 펼쳐져 있다. 보물 제913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다. 약간의 돋을새김으로 있는 둥 마는 둥 앉아있는 여래좌상은 고고한 느낌을 풍긴다. 옷자락엔 얇고 잘게 주름이 잡혔다. 가사의 흘러내림이 물결처럼 촘촘하고, 굴곡진 선이 여울지듯 자연스러워 가벼운 느낌이다.
마애여래불 바위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三層石塔 大正 十一年(삼층석탑 대정 11년), 三層佛塔 大正 十二年(삼층불탑 대정 12년), 小石毾 殘部 大正 十三年 春 再建(소석탑잔부 대정 13년 춘 재건)’ 삼층석탑은 대정 11년(1922년), 삼층불탑은 대정 12년(1923년) 도굴로 무너진 상태였지만 부재를 모아 대정 13년(1924년) 봄에 새로 쌓았다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우리 문화재 수탈이 심했던 터라 조선총독부의 복원 명문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용장사곡 삼층석탑
마애여래불 오른쪽을 돌아 가파른 암벽 사이를 오르면 눈앞에 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이 나타난다. 석탑은 용장골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벼랑에 서있다. 해발 400m의 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쌓아 올린 석탑은, 늠비봉 오층석탑과 함께 산 전체가 탑이고, 탑이 산이 된 셈이다. 몇 번의 도굴로 사리함은 사라졌고, 벼랑 아래 무너져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복원해 세웠다.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탑은 건강하고 잘생긴 청년 같다. 삼단의 지붕돌 모서리는 살짝살짝 치솟아 날아갈 듯하다. 비록 사람의 손을 빌려 섰을지언정, 그 모양새나 위치가 자연과 더불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앞으로는 고위산과 용장골, 은적골의 능선이 힘차게 흘러가고, 서쪽으로는 경주의 너른 들판이 훤히 내다보인다.
탁 트인 시야 속에 유유히 흘러가는 형산강과 평화로운 들판이 걸림 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다보면 산봉우리나 골짜기나 지척인 것을. 탑은 저 들판이 변하고 변하는 것을 묵묵히 보아왔을 것이다.
다시 용장사 터로 내려와 자리를 튼다. 이 깊은 골짜기에 법등을 밝혔던 용장사는 어디로 가고 까마득한 터만 남아 나를 불렀을까. 이쯤에 법당이 있었을 테고, 부처는 또 이쯤에 놓였을 것이다. 올려다보면 머리 없는 석불이나 석탑이 모두 한 능선 아래로 나란하고, 여기서 기도를 하면 석불도 석탑도 다 들었을 것이다. 용장사는 가고 터만 남았지만, 탑과 부처는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며, 그저 오가는 이들이 무탈하기를 살피고 있다.
내려오는 동안 대숲 사이사이에서 많은 기와 조각을 보았다. 실처럼 시작된 계곡을 따라 무수히 많은 기와가 옛 흔적을 따라 아래쪽으로 이어졌다. 설잠교를 건너 바위에 앉아 저무는 볕을 쬐었다.
김시습이 용장골에 있는 것을 안 세조가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했으나, 김시습은 건너편 골짜기로 몸을 피했다. 세상에 인걸은 많으나 내 사람으로 곁에 두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위 벼랑 아래, 단출한 암자 하나 짓고 밤낮으로 법등 밝히고 살았을 김시습을 생각한다. 바람이 문 두드리면 ‘뉘시오? 그저 시나 한 수 읊고 가시오’ 할 것만 같은 키 작은 탁발승.
김시습은 골짜기마다 미친 척 희희낙락하다 결국엔 산기슭 꽃 한 송이, 바람 한 점에도 슬퍼하며 북향화를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꺼억꺼억’ 울었을 탁발승은 세월 따라가고, 그가 홀로 서성였을 벼랑엔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 서서 그를 대신한다. 그가 가고 흐른 세월을 생각하니 저 멀리 풍요로운 들판도 그새 많이 변했겠다 싶다.
↑↑ 보물 제187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이다. 대좌에 앉은 부처는 머리가 없다. |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용장사 터를 뒤로하고 조금만 더 오르니 높은 대좌에 머리 없는 부처가 앉았다. 보물 제187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이다.
자연 바위에 동그란 좌대를 3단으로 쌓아 꼭대기에 앉아 서쪽을 향하고 있다. 부처의 자태가 정갈하다. 가볍게 흘러내린 가사의 주름이 섬세하고, 조여 맨 옷고름의 맵시가 뚜렷하여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훌훌 풀어질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 시절, 용장사 주지 대현이 매일 탑 주변을 돌며 염불을 하자, 석상의 얼굴도 함께 돌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니 이 머리 없는 석불을 두고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미륵불로 보기도 한다.
간혹 석불의 머리가 없는 것을 두고 일제강점기 때, 민족말살정책에 의한 훼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자연적인 상실과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숭유억불정책에 의한 훼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용장사 터 석조여래상은 뒷목 쪽에 내리친 흔적이 있다하니 자연 상실보다는, 어떠한 이유가 됐든 훼손에 가깝다는 견해가 크다.
얼굴이 없으면 어떤가. 얼굴이 있어야만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따뜻하고 환하게 웃고 있어도, 속은 어둡고 냉골인 사람이 있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부처의 표정도 있는 것이다. 내가 웃으면 부처도 웃고, 내가 슬프면 부처도 슬프다.
↑↑ 석불 뒤로 병풍을 세운 듯 암벽이 펼쳐져 있다. 보물 제913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다. |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석불 뒤로 병풍을 세운 듯 암벽이 펼쳐져 있다. 보물 제913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다. 약간의 돋을새김으로 있는 둥 마는 둥 앉아있는 여래좌상은 고고한 느낌을 풍긴다. 옷자락엔 얇고 잘게 주름이 잡혔다. 가사의 흘러내림이 물결처럼 촘촘하고, 굴곡진 선이 여울지듯 자연스러워 가벼운 느낌이다.
마애여래불 바위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三層石塔 大正 十一年(삼층석탑 대정 11년), 三層佛塔 大正 十二年(삼층불탑 대정 12년), 小石毾 殘部 大正 十三年 春 再建(소석탑잔부 대정 13년 춘 재건)’ 삼층석탑은 대정 11년(1922년), 삼층불탑은 대정 12년(1923년) 도굴로 무너진 상태였지만 부재를 모아 대정 13년(1924년) 봄에 새로 쌓았다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우리 문화재 수탈이 심했던 터라 조선총독부의 복원 명문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용장사곡 삼층석탑
마애여래불 오른쪽을 돌아 가파른 암벽 사이를 오르면 눈앞에 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이 나타난다. 석탑은 용장골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벼랑에 서있다. 해발 400m의 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쌓아 올린 석탑은, 늠비봉 오층석탑과 함께 산 전체가 탑이고, 탑이 산이 된 셈이다. 몇 번의 도굴로 사리함은 사라졌고, 벼랑 아래 무너져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복원해 세웠다.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탑은 건강하고 잘생긴 청년 같다. 삼단의 지붕돌 모서리는 살짝살짝 치솟아 날아갈 듯하다. 비록 사람의 손을 빌려 섰을지언정, 그 모양새나 위치가 자연과 더불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앞으로는 고위산과 용장골, 은적골의 능선이 힘차게 흘러가고, 서쪽으로는 경주의 너른 들판이 훤히 내다보인다.
탁 트인 시야 속에 유유히 흘러가는 형산강과 평화로운 들판이 걸림 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다보면 산봉우리나 골짜기나 지척인 것을. 탑은 저 들판이 변하고 변하는 것을 묵묵히 보아왔을 것이다.
다시 용장사 터로 내려와 자리를 튼다. 이 깊은 골짜기에 법등을 밝혔던 용장사는 어디로 가고 까마득한 터만 남아 나를 불렀을까. 이쯤에 법당이 있었을 테고, 부처는 또 이쯤에 놓였을 것이다. 올려다보면 머리 없는 석불이나 석탑이 모두 한 능선 아래로 나란하고, 여기서 기도를 하면 석불도 석탑도 다 들었을 것이다. 용장사는 가고 터만 남았지만, 탑과 부처는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며, 그저 오가는 이들이 무탈하기를 살피고 있다.
내려오는 동안 대숲 사이사이에서 많은 기와 조각을 보았다. 실처럼 시작된 계곡을 따라 무수히 많은 기와가 옛 흔적을 따라 아래쪽으로 이어졌다. 설잠교를 건너 바위에 앉아 저무는 볕을 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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